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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 시베리아 여행 9: 올혼섬 산책
    지난해의 메모 2025. 7. 2. 11:27

     

    -. 북부섬 투어를 다녀온 이후로는 혼자 산책을 하며 후지르 마을 중심으로 여기 저기 다녔다. 숙소를 조금만 벗어나도 적막할 정도로 조용한 이 곳에서 가장 강력한 소리는 새가 내는 소리와 개가 짖는 소리다. 새소리에 이렇게 집중해본 적이 있나 싶다. 인간이 내는 소리는 자동차 소음과 집 짓는 공사 현장에서 나는 소리 정도. 혼자 여행을 다니면 개와 고양이가 친구가 되어주는 행복한 시간이 있는데, 올혼섬에서도 그랬다. 까만 개와 잠시 시간을 보내고 느릿느릿 움직이는 방목한 소들을 바라보는데 바닥에 흔한 깨진 유리병 때문에 걱정된다. 조금씩 걷다가 바위에 걸터앉아서 풍경을 바라보는 패턴을 반복한다. 아무래도 길고 추운 겨울이 있는 지역에서 맞는 봄의 햇빛은 애틋하다.

     

     

    -. 여행으로 시베리아 지역을 다닐수록 러시아에 대해, 이 지역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내게 있던 러시아어도 대부분 증발되어 버려서 남아있는 부분이 많지 않다. 그나마 다 잃어버린 것은 아니라는 점이 위안을 준다. 자신이 하는 일 외에 다른 여지를 별로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 살면서 최소한의 수위에서 간직하고 지켜온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다샤는 전공이 교육과 IT인데 한국어는 '취미'라고 했다. 내게도 러시아어가 '취미'인 것 같다. 그냥 좋아서 계속 하고 싶은 것. 잃고 싶지 않은 것. 그런 취미의 비중이 좀 더 커지기를 바란다.

     

     

    -. 홍차와 블린에 대한 강력한 호(好)는 이번 시베리아 여행이 남긴 것이다. 뻬쩨르에서 지낼 때 수업 중간중간 쉬는 시간에 설탕이 가득 들어간 달디 단 홍차를 사마시긴 했지만 그때는 커피도 차도 즐겨 마시던 시절이 아니어서 추운 겨울에도 집에서 인스턴트 커피에 연유를 넣어 마시곤 했다. 그때의 음료라면 역시 맥주와 오렌지주스겠지. 이번에는 달랐다. 기차를 타고 생활하며 홍차를 계속 마셨고, 올혼섬 숙소에서 나오는 다른 음식보다 매끼마다 기본으로 나오는 블린과 홍차를 정말 맛있게 먹었다. 블린은 쩨레목 같은 곳에서 디저트나 간식처럼 가끔 사먹는 것이었는데, 숙소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즉석에서 만들어주는 기본 블린에 버터와 잼을 취향껏 발라서 홍차와 함께 먹는 그 맛의 감각은 며칠만에 내게 각인되었다.

     

     

    -. 2인실을 호사스럽게 계속 혼자 쓰는 것인가 싶던 날, 룸메이트가 들어왔다. 프랑스인 클레어는 체격이 좋고 활기찼는데 모스크바에서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라고 인사했다. 모스크바와 다르게 너무 조용하다면서 짐을 풀자마자 'enjoy the weather'를 외치고 산책하러 나갔다. 방에 돌아온 클레어는 모스크바에서의 noisy한 생활에 지쳤다는 이야기, 엠게우의 규모와 유력집안 자녀들이 다니는 캠퍼스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올혼섬에서 보낸 마지막 날에 산책을 다니다가 북부섬 투어에서 본 핀란드 커플을 만났는데, 함께 돌아다니며 사진 찍겠냐고 해서 같이 다녔다.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호감형인 아이노와 유씨는 혼자 다니는 나에게 다정한 동행을 제안했고 덕분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숙소에서 쉬다가 저녁 식사 시간이 되었는데 사람들이 많을까봐 일부러 조금 늦게 갔다. 어떻게 하다보니 클레어, 아이노, 유씨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되었고 이태리 남자 한명도 동석했다. 유럽인 테이블에 어색하게 끼어있게 되어서였는지, 여행 하는 동안 사교적 식사를 멀리해서인지 밥 먹는 시간이 불편했다. 그래도 식후 티타임까지 갖고, 소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아이노의 바람에 따라 다같이 산책하며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그 저녁 산책의 시간을 오래 기억했다.

     

     

    -. 이번 여행을 하면서 짧은 만남 후의 이별에도 내가 얼마나 인사를 잘 하고 싶어하는지 새삼 느꼈다. 올혼섬을 떠나던 날 아침에 아이노, 유씨와 제대로 작별인사를 해서 다행이었는데, 섬을 먼저 떠났던 다샤, 코헤이와는 인사를 하지 못한 것이, 특히 다샤에게 잠시나마 좋은 여행 메이트가 되어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쉬워서 한동안 마음이 휑했다. 

     

    마지막 날 밤, 생각보다 수다스럽고 정신없게 하루를 보내고, 늦은 저녁에 바냐에서 씻고 난 후 잠깐 숙소 뒷문으로 나가 해가 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벚꽃동산>의 끝부분에서 아름다운 동산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던 장면이 떠오르며 나는 "쁘로샤이쩨" 하고 중얼거린다. 쁘로샤이쩨, 바이칼. 안녕, 잘 있어! 다시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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